부산에서 만난 Y라는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대학 올라갈 즈음에 주변 친구들의 연애 사건에 얽히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었는데, 다시 부산에서 굴러먹다보니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사이이다. 정말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또다른 친구와 Y 그리고 나 모두 한 동네에 살아서 맥주 한 잔 하자 싶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이 셋 안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친구들의 연애다툼 중에 내가 Y에게 보여줬던 말과 행동들이 Y의 연애관 혹은 남성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모양이어서, Y는 나를 좋은 친구라기보다는 '변태김군'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없다.
어쨌든 Y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지껏 취업 준비는 하고 있지 않았다. 취업을 못해서일수도 있지만 별로 취업 자체에 대해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냥 이런저런 알바를 하면서 용돈 정도를 버는 모양이고, 친구를 만나거나 동네 아기를 돌보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어디든 휘적휘적 걸어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 같다. 연애는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열의는 드러내지만 실상 노력은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습관적으로 연애, 연애 할 뿐이고, 자신이 지금껏 연애 못한 천연기념물이건 뭐건 신경쓰지 않는다. 영어 학원에 다니긴 하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또 어이없어서, 자기 옆에 앉는 남자애가 섬세하면서도 허벅지가 굵어보이기 때문이란다 - Y의 노력이란 딱 이 수준이다 - . 잘생겼다는 이유로 이명박을 찍었고, 부산 사람은 당연히 한나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관심은 없다. Y의 관심은 어머니와 자기 동생, 그리고 자기 자신 이렇게 셋이서만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 세계에는 정말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지나가다간 한 평생을 훌쩍 써도 부족할 지경이라,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응응 고개만 주억거리면서 악수하고 지나가기에도 벅차다. 그래서 마음맞는 친구들 몇몇을 고르고 손에 꼽아보고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곁에 있었던 것인양 지켜보고 또 기대한다. 아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오래 알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래도 무언가 좀 더 편하고 쉬울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본 사람이 그래도 무언가 나을 것이라는 희망. 또다른 세계가 마치 자신이 품고 있는 우주 속에 가만히 돌고 있는 별인양, 자기만 쳐다볼 수 있는 별인양.
나는 어느샌가 그릇된 - 타인의 삶이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향하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그릇된 - 소망을 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 앞서 말한 Y의 덕분이기도 하다. 진부하지만 진지하게만 보이는 타협과 저항, 우습지만 절대 웃어서는 안 되는 절망과 분노의 세계관을 벗어나서도 살아갈 수 있고 또 살아가는, 그럼에도 비난할 수 없는 사람들 중에 Y가 있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Y를 통해 보았다. 어찌어찌 살아야겠다는 식의 부질없는 각오가 전연 없어도 누구보다 쉽게 삶을 놀리고 있는 Y를 보면서 너무 진지했고 너무 재미없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이제 치열한 내적 고민이니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니 하는 식으로 포장된 자아분열을 성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속절없이 스러졌던 당위들, 아예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Y처럼, 아예 그런 것들이 삶의 부분으로 기어들어오지 않았으면.
나는 모순으로 가득찼음에 분명한 이 세계가 어찌어찌 돌아가는 이유를 지금껏 알지 못했다고 이제서야 고백한다. 그러나 분명 망하지 않는 무슨 이유가 있다고 또한 믿게 되었다. 과학에서 신학으로 옮겨가기란 이렇게 한 순간이니, 삶은 자기도 모르게 훅 가는 것. 룸펜이건 잉여건 벌레건 해충이건간에 수많은 다른 세계를 보기란, 만지기란, 건너가기란 불가능하다. 전제에만 두던 비관을 결론에다 옮겨두고, 이제는 자야할 때. 잠드는 자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