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다
by Jerohm
[scrap] 1991년 5월 투쟁, 죽음과 바꾼 패배

1991년 5월 투쟁, 죽음과 바꾼 패배 : 91년 5월 세대의 회고

김 원(한국학중앙연구원)

1. 들어가며

91년 5월 투쟁 혹은 강경대.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아주 낯설거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91년 5월 세대?, 얘들은 386세대의 꼬붕들인가?’하고 편치 않은 심기를 드러낼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뒤에 <투쟁 일지>를 보면 알겠지만 91년 5월 투쟁은 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투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분신과 죽음이 이어진 형국이었다. 그러나 87년과 달리 91년 5월 투쟁은 ‘패배’로 종결되었고, 이에 따른 변화와 단절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민중운동의 쇠퇴와 운동의 위기 등이 최초로 가시화되었던 시점이 91년 5월이었다.

2008년 5월,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새로운 ‘축제의 제의’를 밝혔던 세대들에게 2008년은 ‘촛불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91년 5월 투쟁의 내상을 겪은 세대들에게는 이런 헌사조차 아직 없는 형편이다. 과연 91년 5월 투쟁은 잊혀진 에피소드인가, 왜 그러한가? 이 글에서는 크게 3가지 지점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91년은 사회운동에게 ‘대안담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제기한다. 2008년 촛불시위도 대안적 담론과 조직이 없기에, 한계를 지냈던 것처럼 91년도 유사했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한 죽음으로 시작된 91년 5월 투쟁은 분신이란 ‘죽음의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졌다. 애초 죽음에 대한 도덕적 공분(公憤)에서 시작된 투쟁은 대안담론이 부재한 채 ‘죽음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투쟁으로 이어져갔다. 하지만 죽음이 희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려웠다. 당시 정권 타도 이후 대안 - 임시민주정부, 민주정부, 과도정부 수립 등 - 에 제출되었지만, 대중적인 설득력을 지니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87년 6월 항쟁의 재현’ - 2008년에도 그러했다 -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대안들을 덮어 버렸다. 이 점에서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대안담론이 미쳐 형성되지 못했던 역사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중운동의 미래를 파악하는 중요할 것이다.

두 번째로, 운동조직의 변화라는 지점이다. 98년 경제위기가 한국 사회의 시스템 자체를 극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이었다면, 91년은 주체의 측면에서, 특히 사회운동 주체의 변화를 강제했던 시기였다. 2008년 현재 사회운동은 촛불시위란 큰 계기가 있었지만, 오히려 밑으로부터 대중운동에 의해 끌려 다니는 형편이다. 하지만 91년은 달랐다. 91년 5월 투쟁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의 주도로 이루어진 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큰 거리의 정치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5월 투쟁의 패배와 연이어 일어났던 소련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른바 ‘운동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이 위기는 운동주체의 위기인 동시에 운동조직과 운동이념의 중층적인 위기였다. 바로 정권 타도로 내달았던 대규모 투쟁이 역설적으로 위기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보수정권 하에서 2008년 촛불도 다시 사그러들 수 있으며, 현재도 지속되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91년 5월의 경험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80년대 민중연대 혹은 노학연대의 문제다. 이제 비정규직이 저임금 생산직 노동자뿐만이 아닌, 고학력, 전문직 등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에서 대학생 혹은 대학졸업장은 안정된 직장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닌, ‘예비비정규직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노학연대의 새로운 형태를 고민해 봐야 하겠지만, 91년 5월 당시 노학연대 혹은 사회운동의 민중관은 8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것은 70년대 박애론에 입각한 민중론이었다. 반면 80년대 민중과 지식인간의 연대는 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을 상정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운동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조직된 주체’를 의미했다. 이 점에서 비조직적이고 낮은 의식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사회운동 진영에게 ‘의식화를 시켜야 할 대상’ 혹은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이 점에서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밥풀떼기라고 불린 민중과 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오늘날 지식인과 민중 간의 연대의 방식을 성찰하는 데 있어서 좋은 소재이다.

<1991년 5월 투쟁의 일지>

 - 1991년 2월 27일
명지발전위원회 결렬. 학교측의 등록금 일방고지에 대하여 학생회는 곧바로 등록연기를 결의.
- 1991년 3월 25일
민주적 등록금 책정과 언론탄압 분쇄를 위한 부총장실 점거 농성에 돌입.
- 1991년 4월 26일
오후 3시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전경과 대치하였다. 경찰은 유인작전을 구사하며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하여 골목에까지 백골단을 배치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들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경대열사 사망.
- 1991년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양이 분신하였다. 박승희 양은 강경대열사의 죽음앞에 청년학생들이 앞장서서 싸워야 할 것임을 호소하였다. 서울에서는 4천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여 명지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연세대까지 평화대행진을 벌임.
- 1991년 5월 1일
살인정권 노태우에 항거하며 4월 29일 박승희 양이 투병중인 상황에서 안동대 김영균 군이 분신.
- 1991년 5월 3일
'강경대 학우 폭력살인한 노태우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천세용 학우가 분신후 투신하여 운명.
- 1991년 5월 4일
백골단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에 전국적으로 27만명이 참여.
- 1991년 5월 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가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
- 1991년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서강대에서 분신.
- 1991년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전국적으로 55만명이 참가.
- 1991년 5월 10일
전남대에서 윤용하씨가 배후조종에 대한 비난유서를 남기고 분신.
- 1991년 5월 14일
고 강경대열사 영결식 이후 노제를 위해 시청으로 가려다가 노태우정권의 폭력탄압으로 다시 연세대로 돌아옴.
- 1991년 5월 18일
고 강경대열사 노제. 영결식 도중 연세대 굴다리 위 철길에서 이정순씨가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으며 전남 보성고교 김철수 군이 '5.18 11돌 추모행사' 중에 분신.
- 1991년 5월 20일
고 강경대열사를 망월동에 안장.
- 1991년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정상순씨가 유서를 남기고 분신.
- 1991년 5월 25일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 시위도중 성균관대 김귀정 양 사망.

2. 죽음과 투쟁 - 대안담론의 결여
1991년 5월, 연이은 분신을 보며 김지하는 말했다. “그대들은 시체선호증, 자살특공대, 싹쓸이충동에 사로잡혀 있다”고. 김정한이 <대중과 폭력>(이후, 1998)에서 죽음과 분신에 출발하고, 폭력과 비폭력의 담론에 휩싸인 91년 5월 투쟁의 순환구조에 대해 지적한 바와 같이, 91년 5월 투쟁은 죽음의 이미지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91년 5월 투쟁 역시 타살에 이은 연이은 죽음이라는, 그리고 그것을 백주 대낮에 타살을 자행한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도덕적 공분이라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통적인 정서에 기반한 것이었다.

특히 91년 5월 투쟁은 강경대 이외에도 박승희 등 여러 사람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는 ‘분신’이라는 선택을 했다. 이전 시기에도 한국 사회운동에 분신은 존재했으나, 91년 5월처럼 집단적으로 많은 이들이 분신이란 선택을 한 경우는 없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이후 파시즘 정권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분신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혹자는 91년 5월의 분신을 “자기희생을 통해 대중의 도덕적 분노, 힘의 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천”으로, 또는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의 압도적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로 규정했다. 실제로 열사정신의 계승, 몇 주기 집회마다 열사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현대 한국운동사의 의례(ritual)는 열사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이 전사와 투사가 되어 이어 받자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 91년 5월 투쟁 당시 현수막, 만장, 플랭카드 등에 씌여진 “‘열사는 싸우고 있다”는 구호는 분신이 한국 운동사에서 지니는 역사적 특징을 드러내어 준다.

그렇다면 91년 5월 투쟁에서 죽음이 미친 영향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월 내내 거리와 집회, 투쟁현장을 뒤덮었던 ‘젊은 벗의 초상’은 투쟁의 상징이었다. 열사는 싸우고 있다는 구호로 시작되어 기나긴 노제와 밀고 밀리는 거리에서의 투쟁은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해서, 기나긴 분노와 분신이 꼬리를 물었다. 투쟁이 길어지고 분신이 연이을수록 ‘이제는 열사보다 전사가 필요하다’는, 학우들의 불감증을 질타하는 4월 29일 박승희 열사의 절규와 운동과 소박한 일상에서의 신념을 메모장 등에 적어 놓은 김귀정 열사의 애잔함은 운동의 동력이었다. 당시 김귀정 열사가 남겨놀은 글 일부를 보면, “…난 혁명성이나 투철한 사고방식, 해박한 지식도 없었고 그냥 심산이 좋아서, 선배가 좋아서 지금까지 생활해왔다…우리의 운동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같은 신념이 되어야 하며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다시 살아나는 열사의 죽음은 투쟁하는 자들의, 약자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죽음과 분신은 투쟁을 지루하게 늘어뜨린다는 시각을 만들었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였던 소설가 김별아는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 하고 있다;

“…죽음은 삶의 단절이라는 개인적인 의미를 벗어나 집단을 자극하고 움직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이 재앙이었다…5월 투쟁은 다분히 돌발적이었다. 돌발투쟁으로 시작된 싸움은 숱한 죽음을 매개로 어느덧 복수극이 되어가고 있었고, 죽어간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들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버거운 빚을 남겼다…싸우는 사람들이 싸움 자체를 지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대중들이; 필자) 놓칠 리가 없다. 도덕적 우월감과 설득력은 싸우는 사람들이 즐거움으로 충만할 때에야 비로소 얻어진다…하지만 ‘죽음’을 거역할 수 없는 화두로 잡고 언제까지나 즐거운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죽음의 의미는 50여 일의 짧고도 긴 시간 속에서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심지어 비틀어져 훼손되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진저리를 쳤다. 싸움의 목표나 대안에 대한 고민보다는 언제쯤 이 불가해한 죽음의 투쟁이 끝날 것인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6월 항쟁이 잦아들면서 이른바 전민항쟁이란 이름 아래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해 6월 항쟁의 깃발을 다시 들 때”라는 구호와 그 해 부산에서 열린 전대협 출범식은 투쟁을 상승시키기보다 ‘이젠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란 생각을 갖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임시정부나 과도정부 등 대체권력이나 생존권에 대한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보다 ‘왜 지금 내가 계속 싸워야 하는가’를 둘러싼 자기 자신에 대한 설득이 더욱 시급해졌다. 폭력과 죽음 속에서 5월 투쟁은 지쳐갔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점에서 폭력과 죽음이란 담론이 91년 5월의 핵심적인 담론이 된 것은 ‘비극’(悲劇)이었다. 이 점에서 분신과 죽음은 5월 투쟁의 재앙이자 대안적 담론의 형성을 방해했다. 그러나 5월 투쟁의 패배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3. <변화>라는 이름의 화두(話頭)
91년 5월 투쟁은 이렇게 끝나갔다. 하지만 한 달이 넘는 장기간의 투쟁에 참여하다 지친 영혼들 - 학생운동 활동가들과 대중 - 은 아직 투쟁의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5월 투쟁은 그 투쟁이 시작되기 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들에게 다가온 변화란 대체 무엇일까?

우선 단절에 관한 부분부터 살펴보자.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변혁노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공식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그 조짐은 있었지만, 문제의식의 극적 변화는 91년 이었다. 나의 몇 가지 경험을 들면, 91년 이후 학생운동 학습 패러다임의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나는 교육/선전 파트에서 일을 했다. 이전 시기 주된 학습 커리는 맑스-레닌주의 원전을 중심으로 하고, 소시기(小時期) 전술지침 내지 다른 정치세력의 전략-전술론에 대한 비판을 주로 학습했다. 그런데 91년 5월 투쟁이 종료된 뒤 내려오는 커리와 자료에는 그 전에 듣도 보지도 못했던 그람시, 진지전, 헤게모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 등 생경한 개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91년 5월의 정치적 패배 이후 운동진영 내에는 지배체제의 변화와 헤게모니적 능력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었고, 이른바 '변화'로 대표되는 단어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변화'라는 모토를 중심으로 한 대중 정치활동 방식과 대중조직에 대한 고민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위기론’을 중심으로 한 운동노선의 ‘우경화’ 경향으로 구체화되었다.

91년 5월 투쟁 이후 학생운동의 위기론을 구성하던 실체에 대해서 다시 정리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다만, 변화라는 자기암시 모토와 운동의 우경화 경향은 별개의 것이 아닌, 같이 따라가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이런 변화는 91년 이전 시기 학생운동을 재생산하던 운동질서의 폐기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91년 이전 시기 학생운동 정치조직들은 민중민주학생회(PDH), 선진대중조직론(AMO) 등의 선진적 대중조직이란 형태를 스스로 표방했다. 특히 몇몇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과거 특정 정치조직(이른바 정파)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학생회를 ‘대중에게 돌려주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전 시기 학생회 노선은 민중민주학생회와 자주적 학생회로 구분되었다. 이는 분명한 색조를 지닌 대중조직 사이의 관점의 차이로 드러났다. 그러나 1991년을 기점으로 몇몇 대학에서 ‘왜 학생회 앞에 00주의가 붙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91년 이후 운동주체와 대중 사이의 운동관계-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선언적으로 대중조직을 대중에게 돌려주자는 주장은 이슈를 제기하는 방식 등의 문제로 인해 운동진영 내부의 극심한 대립으로 귀결된 사례가 많았다.

이런 변화와 단절의 조짐에 불을 붙인 사건은 “한국 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이하 한사노)의 출범이었다. 이는 속칭 '3파 연합'이라고 불렸다. 당시 정치적 노동운동 및 전위조직 지향 정치조직들은 비합법적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하고, 공개적인 진보정당 노선을 표방한 사건은 학생운동 활동가들에게는 일대 충격이었다. 이들의 문제의식도 학생운동과 유사했고 - 오히려 학생운동이 이들의 영향을 사전에 받아들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 이들의 경우, 변화보다는 당시 월간 <길>에서 반향을 일으켰던 '고백'과 같은 청산주의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과거 운동질서와 운동노선과의 단절을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91년 이후 운동주체의 단절을 표면적인 운동노선만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그 안에서 91년 이전의 운동 정체성에 대한 유산들과의 단절이란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91년 이후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공황상태는 몇 몇 대학이나 정치조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91년 5월 투쟁 직후 그리고 학생회 선거 이후 3, 4학년 단위 활동가들의 대거 이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들은 주로 88, 89학번들이었다. 이들은 5월 투쟁을 자기운동으로서 체현한 집단들이었다. 전민항쟁(전민중적 항쟁, 87년 6월 항쟁) 세대라고 불리던 87년 이후 대학사회 안에서 학생운동 진영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했고, 전투적인 대중투쟁을 91년까지 전개했던 역사 속의 중심에 존재했던 이들의 '좌절'은 위기라는 담론이나 몇몇 사건 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이들은 87년 이후 혁명운동의 승리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세대이자, 학생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집단이다. 또한 88년 이후 합법적인 맑스-레닌주의 학습과 대중화된 학생회 안에서 운동적 정서를 키워나간 집단들이며, 누구보다 강력한 학생권력을 행사했다. 적어도 이들은 사회주의와 혁명이 대중적으로 담론화되었던 시기에 의식화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토록 이념과 운동에 대해 철저했던 세대였을까? 다시 말해 이들이 학습을 통해 관철시킨 것이 어떤 의미의 사회주의와 혁명으로 다가왔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80년대 후반 그리고 90년대 초반 세대들은 유신 후반기와 5공 정권 아래에서 흑백논리에 길들여진 세대다. 이들의 청년기는 조국근대화 세대의 의식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이는 국민교육헌장, 군사교육, 국민윤리 등의 80년대 초반 학번이 경험했던 학교교육의 규율체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물론 87년을 전후로 해서 고교시절을 겪은 이들 세대는 민주화라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가 80년대 후반 학번과 90년대 초반 학번들의 고등학교 내부의 직선제 요구 운동, 전교조 세대로 상징되던 교육환경의 변화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세대가 유년기와 청년기에 길들여진 군사주의적 경험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10여 년 간에 걸친 교육을 통해 형성된 자기정체성이 1~2년 동안의 의식적 자각을 통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 없으며,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은 의식화라는 효과에 의해 한번에 무너질 정도로 허약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이에 대해 묵종하지만 언젠가 일어설 것이라는, 민중이 언젠가 각성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는 사회를 변혁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권력이 돌아가는 메커니즘과 그 역사적 토대의 근원적 전복을 사고해야 했지만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80년대 그리고 그 연장으로서 91년 운동의 한계는 그 후로 상당 기간 유지되던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다.

4. 91년 5월과 민중 - 밥풀떼기의 상징
91년 5월 투쟁이 민중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일각에서는 당시 중산층의 투쟁 방관을 그들의 기회주의적 본성이라고 비판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층 대중운동의 참가가 87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87년이 미조직 대중과 민중에 의해, 그리고 넥타이 부대에 의해 좌우되었던 투쟁이라면, 91년은 유사한 도덕적 공분에 의해 촉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조직된 민중의 참여 - 대표적으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협의회 - 가 가시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침묵하거나 개별적인 분노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91년 일간지에 잠시 등장했던 밥풀떼기라는 민중들의 시위 참여를 통해 91년 5월 속에서 민중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밥풀떼기란 사전적으로 “군대에서, 위관(尉官) 계급을 낮잡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는 부랑자나 걸인 등의 개인이나 집단을 하대하는 단어다. 문제는 왜 91년 5월 투쟁에서 밥풀떼기라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느냐이다. 과연 91년 5월 투쟁 속에서 민중은 80년대 운동이 바라본 민중과 상이한 것이었을까? 먼저 소설가 김소진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묘사된 당시 운동가들의 이들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신들 밥풀떼기들 때문에 민주화 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 누가 쓰기 시작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소위 밥풀떼기라고 불리는 우리 같은 축들을 학생인지 아니믄 대책위 사람인지가 손가락 끝으로 백골단에게 찍어주는 바람에 달려 갔시다 … 무슨 소리야.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할 대학생들이 시신사수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시위를 해서 싸울 생각은 안 하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 싸우기가 겁나는 놈들은 당장 이 자리를 뜨라구…필요 없다. 기회를 따지는 놈들이야말로 바로 기회주의다. 우리에게 토론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당장 청와대로 가자. 밥풀떼기로 불린 사내들은 들고 있던 각목으로 시멘트 바닥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그만들 두지 못해! 그게 뭐 하는 짓거리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구. 이 따위로 나오면 우리는 당신들(밥풀떼기: 필자)을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어. 어서 그 각목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순순히 물러서라구. 아니면 이후로 당신들이 어떻게 되든 우리 책임이 아니야…"

밥풀떼기로 불리던 이들은 민주불량배로 불리며, 운동진영에 의해 경찰에 넘겨지기도 했다. 또한 밥풀떼기의 과격한 행동은 단세포적 복수심리로 간주되어 심지어 적(enemy)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91년 5월 투쟁과정에서 보인, 또 80년대 운동에서 보인 운동진영의 민중관을 부분적이나마 엿볼 수 있다. 이미 87년 6월 항쟁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듯이, 운동진영의 직접행동과 비조직적 대중의 저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운동진영의 조직보존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87년 6월 명동성당 농성 당시에도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는 자발적으로 모인 농성자들은 ‘조직되지 않은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투쟁’이란 이유로 자진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당시 운동진영 안에서는 여전히 민중에 대한 낭만적 사고 혹은 ‘민중=변혁적 주체’로 등치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상도 민중의 그것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상상적인 민중공동체’를 지향했다. 하지만 이는 민중 속에 내재된 지배와 저항 사이의 균열을 적절하게 천착하지 못한 결과에서 생긴 인식이다. 동시에 민중이라는 실체의 역사적 구체성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 채, 그들을 초역사적인 실체인 붉은 메시아로 바라본 결과이기도 하다. 밥풀떼기의 사례와 같이, 민중의 직접행동의 합리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부재한 채, 정치적 구호의 일치로만 연대를 사고한 민중관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왜 대다수 비조직 민중들은 과격한 직접행동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상한 동시에, 언제든지 이들이 지배집단에게 복종하게 되는 일상적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눈감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91년 5월의 민중관은 여전히 운동담론이란 자기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지식권력의 작동에 의해 재생산되었다. 대학은 민주화의 성지이자 해방구라고 사고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민중성, 대학 외 사회관계와의 일상적 연대에 대해서 사고할 겨를이 없었다. 91년 5월 이전 그리고 이후 끊임없이 민중과 노학연대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과연 대학 시스템 자체를 민중에게 개방하고자 한 시도가 운동진영 안에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 나는 부정적이다. 1968년 68혁명 때, 대학은 일시적이나마 민중들에게 개방되었고, 공공영역에 대한 권력분점, 기존 사회적 재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 운동사에서 이런 경험은 결여되었다. 여전히 대학은 성지일 뿐 민중과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비록 대동제나 특정 이슈에 있어서 노동자들이, 민중들이 대학 내 일부 공간을 공유한 경험은 있으나 이는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최대치는 집회장소의 제공이나 공동 가두투쟁 정도였다. 한 번도 80년대 이후 운동사 안에서 전면적인 운동의제로 대학을 민중에게 개방하고, 대학 내 기존 질서에 돌파구를 찾고자 한 시도는 내 기억에 없다. 바로 이 점이 한국 대학의 공공성을 결여했다는 증거이며, 이런 점에서 91년 5월은 80년대 운동의 연장이었다.

나는 91년 5월 투쟁에서 나타났던 밥풀떼기라는 민중들, 그리고 여전히 80년대적 유산을 지니고 당대에 투쟁했던 것 모든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80년대 이후 민중연대 혹은 노학연대라는 의제들이 바로 정치적 슬로건의 공유를 연대라고 생각한 점이다. 이제 과거, 민중성이라고 인식하던 운동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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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화 > 2008년 11, 12월 합본호에 실린 글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문장, "여전히 대학은 성지일 뿐 민중과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필자가 지적하는 "한국 대학의 공공성" 결여는 대학 엘리트들의 민중에 대한 몰이해, 즉 민중을 계몽의 대상이자 동시에 "붉은 메시아"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이는 대학 엘리트들이 기존 군사주의 정권의 권위적 문화에 찌들어 있었던 결과이다. 대학에 들어간 엘리트들은 민중을 '위해' 생각하고 저항했으나 결코 대학의 문을 스스로 열지 않았다!

2003년에 학교에서 '올리브 프로젝트'라는 도서관 개방운동이 있었는데, 그 때 학생들의 반응이 딱 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고전이 벌어지면 거리를 휘저으면서 가게마다 앞에서 공짜로 음식 달라고 외치던 소비자들... 지역주민과 함께 하자면서도 자기들이 가진 것은 절대 보여주지도 나누어주지도 않으려던 저 소비자들...

by Jerohm | 2008/12/20 01:33 | 공부 | 트랙백 | 덧글(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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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호랑박군 at 2008/12/20 10:45
음... 학생들은 아무래도 '캠퍼스'가 자신의 '배타적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지점을 잘 지적해 놓은 것 같애. 이 지점은 '학벌'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덧. 김별아가 연대 총학생회 간부라는 점은 첨 알았다 ㅋㅋㅋ
Commented by Jerohm at 2008/12/20 13:08
소위 운동권 내에서도 '캠퍼스'가 자신의 '배타적 공간'이라는 의식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건데, 이건 지금 대학 내에서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의 공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점유'한 공간의 개방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멀리 나가지 않아도,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왜 또 그렇게 붉은 색의 점퍼를 단체로 입고 다니는지..

김별아가 누구지--;
Commented by nicht at 2008/12/21 00:04
김 원씨 글 오랫만에 다시 쓰셨네
Commented by Jerohm at 2008/12/21 01:36
난 이 사람이 누군지 몰랐어--;
Commented at 2015/06/05 05: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김진영 at 2015/06/05 05:23
완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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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아카이브네요....
by 정태 at 04/17
까마득한 선배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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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끔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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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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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 재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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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알아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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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끊고 몸 관리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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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0 은파시오 쓸데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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