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다
by Jerohm
입실렌티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응원하기 위해 외치는 구호가 있다.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 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칼 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지금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멋모르고 따라외치는 꼴에 나도 한 때는 동참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지만, 아예 등 돌리고 뒤에서 욕한 것도 꽤 되니 그 때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씻었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저 구호를 외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고려대의 구호는 몇몇 이름을 가져와서 나열한 것이다. 입실렌티는 19세기 초에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그리스 독립을 염원했던 알렉산더 이프실란티A.Ypsilanti의 이름에서 따왔다. 체이홉은 19세기 말에 활동한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A.Chekhov를 말한다. 카시코시 코시코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미국과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코시치우슈코Kościuszko에서 유래 - 약간 애매하지만 - 했다. 칼 마시는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칼 마르크스K.Marx이다. 칼 마르크스를 제외한 다른 이름들은 상대적으로 생소한 편이고, 그래서 구호를 발음하기 애매하게 만들어 외치는 것이 전면적인 억압이 유지된 시기 -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 혹은 군사정권 때 - 에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전술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고려대에 이름을 빼앗긴 인물들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다. 이프실란티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한 비밀결사 조직 필리키 에테리아의 리더였고 짧은 생애나마 평생을 싸우다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죽어갔다. 그는 당시 여러 지식인들과 교분을 맺었고, 그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뿌쉬낀 - 뿌쉬낀도 러시아 제국에 저항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라는 문장만 따 와서 현실에 감사한다는 요상한 메시지로 알려져 있지만 - 도 끼어 있다. 뿌쉬낀의 이름이 붙여진 상까지 받았던 체호프 또한 러시아의 봉건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극작가이다. 코시치우슈코는 소위 말하는 경계인의 입장에서 미국과 폴란드를 왔다갔다 하며 독립전쟁을 이끌고,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농노를 해방하고 부역을 철폐한 인물이었다. 그 뿐인가? 폴란드에 반동 정부가 들어서자 전쟁의 공적에 따라 좋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음에도 박차고 나와 망명객에 합류하였다. 마르크스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쯤 되면 구호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기획과 목적이 있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두말할 나위 없는 저항.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구호를 외치게 되면 저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스펙타클한 광경이 펼쳐진다. 붉은 티를 입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주먹을 불끈 쥐고 가담하고, 심지어는 야키히로 이명박도 서슴없이 외친다. 사실 축제 때나 연고전 때 몰려다니는 꼴이 보기에는 좀 안쓰럽긴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내가 끼어있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입실렌티라는 이름까지 붙어 있는 축제 무대에서 가수들이 콘서트를 벌이는 것도 하루 이틀 있었던 것이 아니니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저 구호를, 저 명백한 목적이 담긴 저 구호를 시체삼아 질질 끌고 다니면서, 학교 게시판에까지 그 따위 쓰레기 글들을 배설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 차라리 저 오래된 구호를 버려라. 자기들의 머리를 박제시킨 것만큼, 자기들 입에서 나온 것들도 박제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by Jerohm | 2008/05/25 03:39 | 메모 | 트랙백 | 덧글(4) |
트랙백 주소 : http://bocnal.egloos.com/tb/437925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Jerohm at 2008/05/25 04:27
Commented by 시봉 at 2008/05/27 16:32
이거 재밌네.
Commented by Jerohm at 2008/05/27 17:28
ㅇㅇ..
Commented by 베풀어 at 2015/08/21 10:14
뜨끔하군요

:         :

:

비공개 덧글

이전블로그
카테고리
링크
최근 등록된 덧글
이런 게 아카이브네요....
by 정태 at 04/17
까마득한 선배님 덕분에..
by 경섭 at 04/15
뜨끔하군요
by 베풀어 at 08/21
완전좋아
by 김진영 at 06/05
ㅋㅋㅋㅋㅋ 재밌네요. ..
by 세진 at 06/15
흠,,, 알아보리다
by 합정 at 06/01
술 끊고 몸 관리 해라..
by aidin at 10/21
24-70 은파시오 쓸데없는..
by bori at 10/16
일어나면 안되죠,,,
by bori at 10/16
박완서 샘은 또다른 위대..
by ㅎ at 09/02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jes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