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마틴 파 사진전에 다녀왔다. 이노 님이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운 터라 약간 기대를 했고, 결과만 놓고 보면 훨씬 더 많은 기대를 해도 좋을 뻔 했다. 프린트의 질은 완벽한 수준이었고 - 도대체 어떻게 뽑았길래 35미리의 결과물이 이렇게 나오는지 아리송해서 똥막대기 아저씨와 한참을 수군거렸다 - , 사람도 거의 없었다. 초기 사진부터 2000년까지 찍은 사진들이 맥락있게 구성되었다. 사진의 배치와 전개가 절묘해서 이 사진전 기획한 사람 참 센스있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마틴 파가 직접 손댄 회고전이었다.
초기 흑백 사진의 임팩트는 약한 편이나 마틴 파가 19세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나름 볼 만하다. 휴양지에 놀러 온 선글라스 낀 아이와 그 뒤에 달린 볼록 거울을 찍은 사진은 특히 재미있다. 마을에 사는 가족들을 그들의 집 안에서 찍은 시리즈도 단정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 알록달록한 색깔임에 틀림없을 - 벽지와 난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족들의 모습 자체가 어떤 냄새를 풍긴다. 인물을 찍고 있긴 하지만 인물을 묘사한 것은 아닌 사진. 이런 틀은 마틴 파의 사진 전체에 지속적으로 보여지는데, 이어지는 한 시골 마을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을 찍은 초기 사진의 경우 그것이 조금 덜하다. 구미가 당기는 사진이 없었다는 말이다.

"마지막 휴양지" 시리즈 중 하나이다. 실제 프린트는 이보다 색깔이 원색적 - 이렇게 붉은 끼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 이며 디테일하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겠다. 쇠락하는 도시의 휴양지를 찍은 사진인데, 엎드려 퍼진 사람 옆으로 트랙터가 서 있고, 저 멀리 바다가 언뜻 보이는 것이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한다 - 그와 동시에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 덕분에 구도가 훨씬 안정된다 - . 사진에서 찾는 가장 기본적인 재미 중 하나가 대립이나 적대를 통한 기묘한 내러티브를 떠올리는 것이라면, 이 사진은 그것에 충실해 보인다. 굴러갈지도 모를 트랙터 바퀴 앞의 늘어진 사람의 등짝과 실제 몰락해서 오락가락하는 뉴 브라이튼의 해변을 서로 대입시키는 것 또한 보너스겠다.


역시 같은 시리즈이다. 실제로 전시된 아래 사진에서 아이의 얼굴과 동작은 이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포착되어 있으며, 널부러진 쓰레기들 또한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리즈 "삶의 비용" 중 한 장이다. "마지막 휴양지"에서와는 다른, 좀 더 인간에게 다가간 사진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의 인간은 인간 '일반'이 아니라 구획되고 구별화된 '어떤' 인간이다. show house day에 흐르는 한 가정의 긴장감은 멋 모르는 아이 둘의 시선과 아내의 모은 손, 그리고 남편의 뭔가 캐묻는 듯한 눈과 입꼬리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편의 주머니는 빵빵한데, 아내의 몸에는 너무 많은 짐들 - 아이도 - 이 매달려 있다. 이게 뭔가? 그리고 저 집 안에서 놀고 있는 저 대머리 둘은 또 뭔가?

시리즈 "삶의 비용" 중 한 장. 저 번개머리와 롱부츠로 표상되는 '불량소녀' 차림은 어딜 가나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사진가에게도.


역시 "삶의 비용"의 한 장면. 이렇게 여러 계층의 활동을 상대적으로 평범한 구도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시리즈 간간이 삽입된 보수당 후원 파티와 보수당원의 만남을 찍은 사진들은 어쩌면 상당히 직관적이다. 마틴 파의 정치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고, 또한 어떤 계층 - 세대 - 의 갈등과 활동의 결과에서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항상 노무현 욕을 하듯이.

보수당 후원 파티를 찍은 사진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삶의 비용" 시리즈 중 이런 사진이 4장 정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다. 여러 계층의 "삶의 비용"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사진이지 않은가? 사진이 직관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전제한다면, 이러한 맥락이 자의적으로 생성되는 것 또한 마틴 파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머릿속에서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다.

이번 전시회의 포스터 한 가운데에 실린, 시리즈 "작은 세계"의 한 장면이자 나에게는 무엇보다 마틴 파 전시회에 대한 '낚시'가 아닐까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이 아크로폴리스라는 세계여행 필수코스에서 상징되는, 그리고 또한 기념되는 '소비'를 은유하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진의 맥락은 그 이전 마틴파의 작업들과 작은 세계 시리즈 전체, 그리고 이후 설치미술을 보아야만 잘 드러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특히 저 사진에서 보이는 단정함은 초기사진과 정물 사진을 제외한 마틴 파 사진을 관통하는 단정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 물론 이 덕분에 전시회 중 문득 만나게 되는 저 사진의 단정함이 더욱 재미있기도 하다 - . 다른 관객들도 그렇겠지만, 내가 이 사진에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즐거운 듯 웃으며 서 있는 할머니들의 검은 머리였다. 엇, 저 사람들 혹시 한국 사람 아닐까? 파닥파닥.
전시회를 구성한 시리즈들은 적절했다. 매그넘포토에 나온 마틴 파 사진들은 한 장 한 장 보여지기 때문에 그 즉자적 감정은 클 수 있어도 - 이조차 마틴 파의 사진에 있어서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마틴 파의 사진 스타일과 색깔은 절대 파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파 스스로 말하는 "모호성"을 읽어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리즈 "삶의 비용"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저 사진 한 장 한 장을 떨어뜨려 놓았을 때, 누가 "풍요의 대중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치러야 할 풍요의 패러독스"를 보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개하지 못한 "하루 여행" 시리즈와 "일본인 통근자들" 시리즈, 일본의 "벚꽃" 시리즈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소리내어 웃게 되는 재미가 있다. 하루 만에 영국인들이 프랑스까지 가서 싼 물건을 사겠다고 발악하는 "하루 여행"의 풍경은 영화 "솔드 아웃"에서 터미네이터 슈워제네거가 온 몸으로 보여준 바 있거니와, 그 물건이 다름 아닌 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틴 파의 조롱은 더욱 근거를 얻는다. 오줌을 싸다가 파의 플래시를 정면으로 받은 마지막 사진은 이 조롱의 절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똥막대기 아저씨와 내가 한참을 머리굴려야 했던 시리즈, "꽃"은 그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 시리즈를 소개하는 아가씨의 무지함이 더욱 재미있었다. 아가씨는 "사람의 주변에서 항상 아웃포커싱의 대상이었던 꽃을 반대로 인포커싱 시켜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넘어갔다. 풍요로운 소비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오죽하면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진부한 카피로 설명되는 이 전시회에 뜬금 없이 등장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는 애교라고 봐 주기에는 가슴이 불끈불끈 한다. 사진 자체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기묘하게 높인 꽃의 채도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는 관객들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양지에서 놀거나 길을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높은 채도의 꽃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관계의 이중성 혹은 모순을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기묘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틴 파가 지속적으로 갖고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그 사회에 놓인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이 그 꽃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엄청난 채도가 그걸 증거하고 있다. 이것을 그저 마틴 파가 말하는 "모호성"의 세계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부실을 덮어버릴 수 있을까? 이 시리즈는 설치 미술 "상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물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마틴 파 스스로 그 상징의 대상을 인간에게서 사물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변주에 가깝다. 실제로 "상식" 바로 전 시리즈가 이 "꽃"이기도 하다. 이를 읽어내지 못한, 그러나 사진을 설명한 그 아가씨는 똥막대기 아저씨 말대로 "얼굴 예쁘고 돈 많은 집안 - 그러니까 졸부들 - 에서 교양 쌓겠다고 미술 전공한 사람"에 가까울지 모른다. 아, 나의 편견이 점점 무너질 수 없는 벽이 되어가고 있다.
덧붙이자면, 나는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상 아닌 것이 없으며 또한 일상인 것이 없다. 외국에서만 공부하고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항상 일상에서만 살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진에게서 받은 그들의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을 그저 "일상"이라는 시공간의 상태로 구체화하는 그들의 직관이 놀랍기만 하다. 인터넷 갤러리에서, 그리고 이 마틴 파의 사진전 글들과 소개에서 그것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 사람들에게 일상이란, 이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이것이 또한 "모호성"의 변종인가?
초기 흑백 사진의 임팩트는 약한 편이나 마틴 파가 19세 때 찍은 사진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나름 볼 만하다. 휴양지에 놀러 온 선글라스 낀 아이와 그 뒤에 달린 볼록 거울을 찍은 사진은 특히 재미있다. 마을에 사는 가족들을 그들의 집 안에서 찍은 시리즈도 단정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 알록달록한 색깔임에 틀림없을 - 벽지와 난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족들의 모습 자체가 어떤 냄새를 풍긴다. 인물을 찍고 있긴 하지만 인물을 묘사한 것은 아닌 사진. 이런 틀은 마틴 파의 사진 전체에 지속적으로 보여지는데, 이어지는 한 시골 마을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을 찍은 초기 사진의 경우 그것이 조금 덜하다. 구미가 당기는 사진이 없었다는 말이다.

"마지막 휴양지" 시리즈 중 하나이다. 실제 프린트는 이보다 색깔이 원색적 - 이렇게 붉은 끼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 이며 디테일하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겠다. 쇠락하는 도시의 휴양지를 찍은 사진인데, 엎드려 퍼진 사람 옆으로 트랙터가 서 있고, 저 멀리 바다가 언뜻 보이는 것이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한다 - 그와 동시에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 덕분에 구도가 훨씬 안정된다 - . 사진에서 찾는 가장 기본적인 재미 중 하나가 대립이나 적대를 통한 기묘한 내러티브를 떠올리는 것이라면, 이 사진은 그것에 충실해 보인다. 굴러갈지도 모를 트랙터 바퀴 앞의 늘어진 사람의 등짝과 실제 몰락해서 오락가락하는 뉴 브라이튼의 해변을 서로 대입시키는 것 또한 보너스겠다.


역시 같은 시리즈이다. 실제로 전시된 아래 사진에서 아이의 얼굴과 동작은 이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포착되어 있으며, 널부러진 쓰레기들 또한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리즈 "삶의 비용" 중 한 장이다. "마지막 휴양지"에서와는 다른, 좀 더 인간에게 다가간 사진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의 인간은 인간 '일반'이 아니라 구획되고 구별화된 '어떤' 인간이다. show house day에 흐르는 한 가정의 긴장감은 멋 모르는 아이 둘의 시선과 아내의 모은 손, 그리고 남편의 뭔가 캐묻는 듯한 눈과 입꼬리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편의 주머니는 빵빵한데, 아내의 몸에는 너무 많은 짐들 - 아이도 - 이 매달려 있다. 이게 뭔가? 그리고 저 집 안에서 놀고 있는 저 대머리 둘은 또 뭔가?

시리즈 "삶의 비용" 중 한 장. 저 번개머리와 롱부츠로 표상되는 '불량소녀' 차림은 어딜 가나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사진가에게도.


역시 "삶의 비용"의 한 장면. 이렇게 여러 계층의 활동을 상대적으로 평범한 구도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시리즈 간간이 삽입된 보수당 후원 파티와 보수당원의 만남을 찍은 사진들은 어쩌면 상당히 직관적이다. 마틴 파의 정치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고, 또한 어떤 계층 - 세대 - 의 갈등과 활동의 결과에서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항상 노무현 욕을 하듯이.

보수당 후원 파티를 찍은 사진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삶의 비용" 시리즈 중 이런 사진이 4장 정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다. 여러 계층의 "삶의 비용"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사진이지 않은가? 사진이 직관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전제한다면, 이러한 맥락이 자의적으로 생성되는 것 또한 마틴 파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머릿속에서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다.

이번 전시회의 포스터 한 가운데에 실린, 시리즈 "작은 세계"의 한 장면이자 나에게는 무엇보다 마틴 파 전시회에 대한 '낚시'가 아닐까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이 아크로폴리스라는 세계여행 필수코스에서 상징되는, 그리고 또한 기념되는 '소비'를 은유하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사진의 맥락은 그 이전 마틴파의 작업들과 작은 세계 시리즈 전체, 그리고 이후 설치미술을 보아야만 잘 드러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특히 저 사진에서 보이는 단정함은 초기사진과 정물 사진을 제외한 마틴 파 사진을 관통하는 단정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 물론 이 덕분에 전시회 중 문득 만나게 되는 저 사진의 단정함이 더욱 재미있기도 하다 - . 다른 관객들도 그렇겠지만, 내가 이 사진에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즐거운 듯 웃으며 서 있는 할머니들의 검은 머리였다. 엇, 저 사람들 혹시 한국 사람 아닐까? 파닥파닥.
전시회를 구성한 시리즈들은 적절했다. 매그넘포토에 나온 마틴 파 사진들은 한 장 한 장 보여지기 때문에 그 즉자적 감정은 클 수 있어도 - 이조차 마틴 파의 사진에 있어서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마틴 파의 사진 스타일과 색깔은 절대 파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파 스스로 말하는 "모호성"을 읽어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리즈 "삶의 비용"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저 사진 한 장 한 장을 떨어뜨려 놓았을 때, 누가 "풍요의 대중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치러야 할 풍요의 패러독스"를 보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개하지 못한 "하루 여행" 시리즈와 "일본인 통근자들" 시리즈, 일본의 "벚꽃" 시리즈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소리내어 웃게 되는 재미가 있다. 하루 만에 영국인들이 프랑스까지 가서 싼 물건을 사겠다고 발악하는 "하루 여행"의 풍경은 영화 "솔드 아웃"에서 터미네이터 슈워제네거가 온 몸으로 보여준 바 있거니와, 그 물건이 다름 아닌 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틴 파의 조롱은 더욱 근거를 얻는다. 오줌을 싸다가 파의 플래시를 정면으로 받은 마지막 사진은 이 조롱의 절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똥막대기 아저씨와 내가 한참을 머리굴려야 했던 시리즈, "꽃"은 그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 시리즈를 소개하는 아가씨의 무지함이 더욱 재미있었다. 아가씨는 "사람의 주변에서 항상 아웃포커싱의 대상이었던 꽃을 반대로 인포커싱 시켜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넘어갔다. 풍요로운 소비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오죽하면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진부한 카피로 설명되는 이 전시회에 뜬금 없이 등장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는 애교라고 봐 주기에는 가슴이 불끈불끈 한다. 사진 자체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기묘하게 높인 꽃의 채도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는 관객들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양지에서 놀거나 길을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높은 채도의 꽃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관계의 이중성 혹은 모순을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기묘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틴 파가 지속적으로 갖고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그 사회에 놓인 인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이 그 꽃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엄청난 채도가 그걸 증거하고 있다. 이것을 그저 마틴 파가 말하는 "모호성"의 세계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부실을 덮어버릴 수 있을까? 이 시리즈는 설치 미술 "상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물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마틴 파 스스로 그 상징의 대상을 인간에게서 사물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변주에 가깝다. 실제로 "상식" 바로 전 시리즈가 이 "꽃"이기도 하다. 이를 읽어내지 못한, 그러나 사진을 설명한 그 아가씨는 똥막대기 아저씨 말대로 "얼굴 예쁘고 돈 많은 집안 - 그러니까 졸부들 - 에서 교양 쌓겠다고 미술 전공한 사람"에 가까울지 모른다. 아, 나의 편견이 점점 무너질 수 없는 벽이 되어가고 있다.
덧붙이자면, 나는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상 아닌 것이 없으며 또한 일상인 것이 없다. 외국에서만 공부하고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항상 일상에서만 살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진에게서 받은 그들의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을 그저 "일상"이라는 시공간의 상태로 구체화하는 그들의 직관이 놀랍기만 하다. 인터넷 갤러리에서, 그리고 이 마틴 파의 사진전 글들과 소개에서 그것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 사람들에게 일상이란, 이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이것이 또한 "모호성"의 변종인가?



